스티븐 말리노프스키 ‘뮤직 애니메이션 머신’
베토벤의 ‘대(大)푸가(Grosse Fuge) 작품 133’은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연합뉴스
샌프란시스코 체임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지휘자 벤저민 사이먼(왼쪽)과 ’뮤직 애니메이션 머신’ 개발자 스티븐 말리노프스키(오른쪽)가 지난달 27일 연주회를 앞두고 토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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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원래 이 곡을 현악사중주 제13번 작품 130의 마지막 악장으로 1825년 작곡했으나, 이듬해 초연 후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는 친구들의 의견이 쏟아지자 다른 곡을 새로 작곡해 바꿔 넣고, 대신 대푸가는 별도 작품으로 독립시켰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곡에 대해 “완벽하게 현대적인 음악 작품이며, 영원히 현대적일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음악을 들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또 음악이라는 예술 장르 자체가 구체적인 사물을 직접 묘사하거나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면서 ‘눈으로 보도록’ 해 이해를 돕는 것이 퇴직 소프트웨어 개발자 스티븐 말리노프스키(61, www.stephenmalinowski.com)가 요즘 하는 일이다.
그는 요즘 한국에서 흔히 얘기하는 ‘융합형 인재’다.
캘리포니아대(UC) 샌타 바버라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대학 강사와 피아니스트로 일했으며, 1984년부터 이노시스, 오디언스 등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기업들에서 소프트웨어·알고리즘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음향·음성인식 기술을 개발하다가 2010년 퇴직했다.
말리노프스키 씨는 대학생이던 1974년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의 시칠리아노를 듣다가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당시 음악을 듣다가 마치 음표들이 춤추는 듯한 환각을 경험한 것을 계기로 음악의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뮤직 애니메이션 머신’(Music Animation Machine, www.musanim.com) 시스템을 고안해 계속 발전시켜 왔다.
처음에는 종이 두루마리에 그림을 손으로 그렸으나 1985년 8비트 컴퓨터 ‘아타리 800’을 구입해 진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이어 미디(MIDI) 기술을 이용한 입력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영국의 16세기 르네상스 작곡가 버드로부터 스카를라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스트라빈스키, 베베른 등을 거쳐 자신이 쓴 곡들까지 수백 곡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10일(현지시간) 기준으로 말리노프스키의 유튜브 채널에는 375개의 비디오가 공개돼 있으며, 열람 회수는 1억2천500만건이 넘는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드뷔시의 ‘월광’은 아이패드용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다.
말리노프스키 씨는 자신의 비디오가 일종의 ‘악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보통의 악보와 마찬가지인데, 다만 보통 악보가 기호로 돼 있고 이를 읽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과 달리 이것은 그래픽으로 돼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음악 연주·재생과 동시에 그 흐름에 맞춰 함께 보도록 돼 있는 시각 작품이다.
각각의 음표는 막대기, 타원, 정사각형, 원, 마름모 등 색깔이 있는 도형으로 표시되며, 도형의 가로 길이가 길수록 긴 음표다. 또 도형이 높은 위치에 표시될수록 음 높이가 높다는 뜻이다.
그래픽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며, ‘바로 지금’ 연주되고 있는 음표를 나타내는 도형은 한가운데 표시되고 밝기를 높이는 방식으로 강조된다.
손잡이를 돌려서 음악과 영상을 동기화하는 장치도 있어, 미리 녹음된 오디오 재생뿐만 아니라 실제 생연주회에서도 속도를 정확히 맞출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체임버 오케스트라(SFCO, www.sfchamberorchestra.org)의 음악감독 벤저민 사이먼은 “베토벤의 대푸가는 그야말로 ‘하드코어’(hardcore)한 음악”이라며 “난해하고 복잡한 음악을 청중들이 들을 때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함께 하면 둘 사이의 연관을 파악해 이해를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 음악 애호가들도 여러분들이 사는 지역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 놀라운 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먼이 지휘하는 SFCO는 지난달 말 샌프란시스코, 팰로앨토, 버클리 등에서 잇따라 열린 연주회에서 말리노프스키의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면서 베토벤의 대푸가를 연주해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실리콘 밸리라는 지역 특성을 반영해 예술과 테크놀로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음악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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