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하마스·레바논 반시리아 정당 잇따라 접촉
사우디아라바이가 중동의 패권을 놓고 경쟁국 이란의 ‘시아파 벨트’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이란이 중동 내 현안에 사실상 모두 엮인 만큼 핵협상 타결로 이란의 역내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을 수니파 종주국으로서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사우디는 이란의 경제·금융 제재 해제로 얻는 막대한 자금을 헤즈볼라와 시리아 정권, 후티에 지원할 것이라고 의심한다.
살만 사우디 국왕은 이란 핵협상이 타결된 지 사흘만인 1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무장정파 하마스의 지도자 칼레드 마샤알을 3년만에 접견했다.
하마스는 이슬람권의 공적인 이스라엘과 무력으로 끈질기게 맞서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동정과 지지를 얻어왔지만, 최근 수 년간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왕따’ 신세였다.
하마스가 애초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에서 파생된 탓이다.
무슬림형제단은 2011년 반정부 시위로 정권을 잡았다가 군사쿠데타로 결국 실권한 모하마드 무르시 전 이집트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다. 사우디 등 걸프 지역 수니파 왕정은 같은 종파지만 ‘아랍의 봄’ 확산을 우려해, 무슬림형제단을 강하게 배척했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이 전통적 우방 카타르와 지난해 외교관계 단절 직전의 위기까지 치달았던 이유도 카타르가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해서다. 현재 마샤알이 거주하는 곳도 카타르다.
이런 영향으로 사우디와 하마스의 사이도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란 역시 이스라엘과 맞서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지만, 하마스가 이란이 지원하는 시리아의 시아파 정권과 충돌하는 반군을 지원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중동의 지정학적인 구조상 이 지역의 정치·무장 세력은 통상 사우디와 이란 둘 중 한 곳과 연관되게 마련인데 하마스는 그렇지 못한 처지가 됐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살만 사우디 국왕의 하마스 지도자 접견은 다분히 이란을 의식한 외교적 제스처로 해석된다.
같은 수니파라는 점을 고리삼아 시리아 정권과 대척점인 하마스에 손을 내민 셈이다.
이와 함께 수니파 종주국의 위치에서 이스라엘에 ‘맨주먹’으로 싸우는 이미지인 하마스를 끌어안는 모양새를 과시하는 부수효과도 얻었다.
이를 둘러싼 해석이 분분해지자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23일 “마샤알은 성지 순례를 왔을 뿐”이라고 애써 진화했지만, 이란은 즉시 양측의 회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살만 국왕은 이어 19일 레바논 기독교 정당 레바논저항당(LF) 당수 사미르 게아게아를 사우디로 불러 만났다.
중동 현지 언론에선 이 만남이 레바논 정세에 대한 사우디 국왕의 의중을 듣기 위해 게아게아 측에서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이 만남 역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레바논은 시리아 내전의 영향을 받아 친시리아(친이란) 시아파 세력인 ‘3·8연대’와 반시리아(반이란) 성향의 ‘3·14연대’가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3·8연대는 친이란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다. 3·8연대가 헌법상 기독교계가 맡아야 하는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면서 레바논은 현재 1년 2개월간 대통령이 공석일 정도로 정치적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살만 국왕과 게아게아 당수의 회동은 이란의 영향력이 커져버린 레바논 정세에도 사우디가 비로소 나서는 신호탄으로도 볼 수 있다.
공교롭게 넉 달째 내전 중인 예멘의 정황도 모멘텀이 생겼다.
사우디에 도피 중인 예멘 정부를 지지하는 민병대가 17일 남부 중심도시 아덴을 시아파 반군 후티로부터 탈환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예멘 내각 일부가 복귀한데 이어 아덴국제공항과 아덴항구가 재개됐으며, 사우디는 친정부 민병대에 지원할 무기와 물자를 항공편으로 직접 실어날랐다.
일각에선 핵협상 타결에 자극 받은 사우디가 급선무인 예멘 내전을 최대한 이른 시일내에 우세하게 결정지으려 한다는 전망이 나온다.
사우디가 직접 개입한 예멘 내전이 장기화되면 시아파 반군 후티를 대리자로 삼은 이란에 이득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의 22일 사우디 방문시에도 이란의 테러조직 지원과 중동 문제 개입에 미국의 단호한 대응을 다짐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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